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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모시,명주,무명 등 우리 전통 섬유에 대한 자료들을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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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시옷-정성으로 지어 기품으로 입다.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5-04-29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2138
 

2003년 6월호



 


[기/획/연/재  전.통.문.화.의 디.딤.돌] 

 

모시옷 - 정성으로 지어 기품으로 입다 / 문화유산해설사 이승진


 

   날이 더워지면 무엇이든 시원하게 보이는 것을 찾게 마련인데 여름철 모시옷 만큼이나 시원한 의복도 없다. 모시로 지은 옷은 통풍이 잘되 시원하며 가볍고 깔깔하고 산뜻한 맛은 무명이나 삼베가 따르지 못한다. 모시 원단의 실루엣은 우아하고 고전미 넘치는 전통한복과 다양한 디자인의 생활한복 뿐만 아니라 양장, 그밖에 생활 소품으로 그 용도가 다양하다.
모시는 우리나라의 특색을 지닌 옷감으로 충남 한산에서 생산하는 가는 모시(세모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모시를 곱솔 바느질한 깨끼 저고리의 정갈한 맵시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치마는 폭 28cm의 12폭 치마를 만들어 입었는데 빨고 풀먹이고 만지고 다리는 여인의 특별한 솜씨가 깃들어야 한다.
모시 적삼과 치마, 바지를 입을 때 남자의 경우 고의 안에 반드시 속바지를 입고 속적삼을 입는 것이 원칙이다. 여인의 경우도 모시 속바지 위에 속치마를 입고 치마를 입는 것이 순서이고 윗옷으로는 속적삼을 입고 모시 적삼을 입어야 바른 차림이다.
여인들이 12승 정도로 적삼, 깨끼 저고리를 지어 입을 때는 꼭 속적삼을 받쳐 입어야 한다. 그 이유는 '모시에 얽힌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흔히 모시는 여인의 손에서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첫번째는 대에서 껍질을 벗기고 째고 베틀에 걸어 짜는 여인의 여공으로 구분 지어져 태어나 상품, 중품, 하품이 되고 두 번째로는 여인들이 빨고  풀먹이고 만지고 다리는 정성 여부로 경쾌한 옷으로 태어나거나 후줄그레 하게 태어 나는 것이 판가름 된다.  모시는 입는 사람의 조심성 여부에 따라 그 태가 살고 죽는다.
탄성이 좋지 못하여 잘 구겨 지는 단점이 있어 입는 것이 귀찮은 듯하나 고운 모시옷을 입고 조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면 더욱 우아한 자태를 풍기게 된다.

모시의 유래
  
모시는 한자로 저(苧,紵), 저포(苧佈), 저마포(苧麻佈) 등으로 불리우고 우리나라 최초 문헌자료 삼국사기 신라에서는 삼십승 저삼단을 당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 문헌 기록에서 저마는 대개 저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계림유사(鷄林類事)에 고려 방언으로 저왈저모(苧曰苧毛), 저왈모시배(苧曰毛施背)라 하여 오늘날 모시라는 명명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있다.
모시가 외국에 알려진 기록으로는 고려 인종때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글에 '모시가 백옥처럼 희고 맑아 결백을 상징하고 윗사람이 입어도 의젓함이 나타나며 백저포로는 상복을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요가 폭증하여 공급이 이를 따르지 못하자 중종때 신분별로 엄격히 새수를 제한하는 금제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직조 발달이 퇴보 되었고 겨우 한산을 비롯한 저산팔읍에서만 명맥을 유지하여 일제 강점 초기 때 장날을 따라 모시 보부상들이 하나의 졍제권을 형성하였다가 말기에 이르러 한산모시의 명성이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해방 후 시장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68년 이후 섬유산업의 발달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재배 면적이 감소하여 생산량이 감소 추세에 있다.

  모시 중에 고급옷감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지역에서 나는 한산 모시를 들 수 있다.
한산 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여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에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결이 가늘고 고운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한산지역에는 한산저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알려 주는 전설이 남아있다.
신라 때에 한 노인이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유달리 깨끗한 풀이 있어 껍질을 벗겨보니 그 껍질이 늘씬하고 보들보들하여 이것으로 실을 뽑아 베를 짰는데 이것이 한산 모시의 시초가 되었다. 1967년 문정옥씨가 한산의 모시 짜기 기능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12승 세모시를 짜고 있다.

모시풀이 모시가 되기까지

  모시풀을 베어다가 잎은 훑어 내리고 남은 줄기의 맨 바깥쪽 껍질도 벗긴다.
이렇게 표피가 벗겨진 인피를 태모시 라고 부른다. 태모시를 한줌씩 묶어 물에 하루쯤 담가 두었다가 꺼내 햇빛에 말린다. 물에 담가 두었다가 햇빛에 바래게 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할수록 질 좋은 모시를 얻게 된다.
그다음 태모시를 다시 물에 적셔서 한올씩 쪼개야 하는데 올을 가늘게 쪼개느냐 굵게 쪼개느냐에 따라 모시품질의 상,중,하가 가려진다.
쪼개진 모시올을 긴 실로 만들어야 하는데 짧은 모시올의 두끝에 침을 묻혀 무릎 위에서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한다. 모시는 굵고 가늘기에 따라서 새(승)가 정해진다.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한다. 1새는 80올이며 모시올 10올을 1모라고 하여 8모가 1새가 된다.
모시를 잘 짜기 위해서는 실내 통풍이 안 되는 곳을 선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시 짜기는 베틀을 조립하여 오뉴월 복중에 하여야 튼튼하다.
그 이유는 모시는 많은 부순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은 안 된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찌는 듯한 복중에 움집에서 모시를 짰는데 갓 짜낸 모시는 생모시라 부른다. 이 생모시를 다시 증방에서 찌거나 잿물에 삶으면 부드럽고 깨끗한 익은 모시가 된다. 생모시와 익은 모시 중간을 반저라고 한다.
모시는 베틀에서 짜낸 생모시를 그대로 쓰기도 하나 이럴 경우 때가 묻지 않도록 창호지에 잘 싸서 따뜻한 곳에 1~2년 묵혀 두었다가 색깔이 고아지고 광택이 나면 사용한다.

모시에 얽힌 이야기
  '세모시 고쟁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여자에게 화냥기가 있을 때 '세모시 고쟁이'라고 빗대어 이야기 한다. 세모시는 고운 올올이 투명하여  남자들의 눈을 쏠리게 하며 보일 듯 말듯한 몸의 살색이 옛 부녀자들의 노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채워 준다. 하체 내의인 고쟁이는 화냥기를 비유한다. 그래서 후한 때 후궁들은 세모시를 잠옷으로 만들어 입음으로 황제를 유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살색이 비치는 모시는 야하다 하여 점잖은 집 사대부 여인네들은 기피하였다. 그 이유는 살색 세모시를 알몸에 입으면 화냥기의 빛깔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모시는 여느 모시보다 한 필 당 세배나 비싸게 팔렸다.
단골 고객은 주로 기생들 이었고 옛 기도(妓道)에 한 번 수청들면 살빛 세모시 한 필을 구해 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고 한다. 곧 한국인의 외도가 살빛 세모시 값을 폭등 시켰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모시를 만드는 작업과정 역시 까다로와 그 수공이 다른 모시보다 세 곱절이상 든다고 한다.
모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말로 산적이 옷까지 벗겨 약탈하는 식으로 송두리째 가져 가거나 망하게 하는 것을 "한산 처녀 모시 훑듯 한다"고 하는데 이는 1년에 세 번 베어낸 모시는 대나무 칼로 뿌리 쪽을 위로 잡고 훑어 내리는 데서 비롯한다.
tea_may@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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