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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모시,명주,무명 등 우리 전통 섬유에 대한 자료들을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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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땅에서 더이상 무명이 나오지 않는다????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5-03-21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1388
 
<문화초대석> 패션 디자이너 김훈
사는 일이 그냥 예술인 사람

(광주=연합뉴스) 이종호 기자

우리 땅에서 더이상 무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무명의 생산이 중단됐다는 말인가? 요즘 아무리 갖가지 옷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그래도 문익점 선생이 어렵사리 붓뚜껑에 씨앗을 숨겨와 만들고 퍼뜨린 민족의 원단을 더이상 거들떠보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단다. 적어도 수직(手織) 무명으로 옷을 짓는 한국 유일의 패션 디자이너 김훈(金焄.49)이 알기로는 70년대부터 서서히 중단됐단다. 엄밀히 말하면 글자 그대로 완전히 끊긴 건 아니고 전남도문화재로 지정받은 나주의 한 장인이 만들기는 하는데 워낙 비싸서(한 필에 100만원 이상 호가!) 도통 팔리지를 않는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명은 100% 수직을 말한다. 기계직이야 많이 나오고 있지만.

"목화를 재배해서, 먼지 풀풀 날리는 속에서 솜을 틀고 타래질을 해서, 그걸 가지고 하루 종일 실을 꼬아 천을 만들어야 하니 그 인건비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공정이 20단계나 됩니다. 모시나 삼베가 까다롭다고 하지만 그것들과도 또 다릅니다. 다른 건 다 관두고, 요즘 농촌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어요." 김훈은 일찍부터 무명에 반해 요즘은 아예 무명으로만 옷을 만든다. 20년 전부터 할머니들이 장터에 내다 팔거나 쓸모없다며 그냥 버리는 것들을 눈에 띄는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점방(자신의 부티크인 `김훈 꾸뛰르'를 그는 그렇게 부른다) 곳곳에는 원색 혹은 자연염색된 무명천이 도처에 쌓여 있고 누워 있다. 덕분에 "제가 늙어 죽을 때까지 옷 만들 천은 충분합니다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옷감나라에서 한 가지가 단종(斷種)되는 날이 곧 올지 모른다.

김훈은 국내 초기 패션 디자이너의 산실이었던 국제복장학원을 1977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전국양재경진대회에서 디자인부문 최우수상을 탔다. 스타일화 발표회를 따로 열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를 `남도의 핸섬보이'라 부르는 패션계의 원로 최경자 원장이 그에게 가장 반한 것도 그의 이런 타고난 감각이었다.

이처럼 디자인을 통해 다양한 파격과 실험을 거듭하던 그가 무명에 눈길을 주게 된 것은 어느날 문득 찾아온 우리 것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그 무렵 한국을 방문했던 피에르 카르댕이 한 말, "고유의 전통 없이는 세계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그 말이 젊은 디자이너의 가슴을 쳤다. 지금 생각하면 상식적인 충고이지만, 사실 구미의 것에 경도돼 있던 그 무렵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카르댕의 말은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전통의 소재와 첨단의 감각 81년 김훈 꾸뛰르의 문을 연 이래 옷은 물론 이불이나 박수룡 같은 미술가들과 어울려 국내외에서 설치작업도 하는 등 자기표현을 위한 다양한 형식을 찾아봤지만 언젠가부터 결국은 나의 옷, 우리의 옷만을 생각하게 된다.

"컬렉션을 구경하러 파리엘 네 번 갔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그 숙제를 풀지 못했는데, 88년 파리에서 패션쇼를 보면서 내 옷에 내 것이 없다는 생각이 정말이지 절실하게 머리를 때렸습니다." 여기서 그의 고민이 시작됐다. 대량생산을 통한 돈벌이인가, 아니면 개성과 예술의 옷으로 갈 것인가. 결국 우리 건축, 우리 음식, 우리 전통이 반영된 우리 옷으로 그는 결론지었다. 그리고 소재는 무명이었다.

"무명은 우선 우리 고유의 소재구요, 무엇보다도 착용감이 좋습니다. 그리고 단아하면서도 은근히 화려해요. 게다가 물빨래를 해도 될 만큼 실용적이죠.

무명의 색깔은 서양식의 화이트가 아닙니다. 아이보리와도 좀 다르고, 옥빛이 도는 게, 그러니까 그게 바로 `흐건' 색이죠. 원래는 약간 누런 빛이 돌다가 몇 번 빨면서 `흐건' 색이 나오는데, 아, 기가 막히죠." `흐건'이라는 전라도 말은 `뭔가 남다른 흰색'일 터였다.

그의 극진한 예찬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감이 약하다는 흠이 있다. 그걸 보강하는 방법을 김훈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냈다. 우선 가장자리 트리밍을 콤비치면서(두겹으로 하면서) 심지를 강하고 고급스런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인 틀을 잡아준다.

그 다음엔 옷을 만들면서 디자인으로 원단의 약한 성질을 보완한다. 즉 난, 물결, 고목 등 회화적 느낌의 무늬를 놓으면서 미싱작업을 통해 자연스레 천에 힘을 실어주어 부분부분의 틀을 잡아준다. 또 겨울옷을 만들 때는 실크와 솜으로 패드를 만들어주면 완벽한 보온이 된다.

"사실 무명이 약하긴 합니다. 원단 자체가 어떤 물리적 힘을 지닌 건 아니죠. 하지만 지구력과 보존성은 아주 뛰어납니다. 수백년 된 미라에서 무명옷이 그대로 보존돼 있지 않습디까? 좀을 먹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실을 한 올 한 올 꼴 때 침을 바르는 덕분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추측이다.

사실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그의 옷을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줄을 서 있다. 광주만이 아니라 서울 대구 등 타 지역에서도 주문이 밀린다. 하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답게 그는 결코 무리하거나 서둘러 제작하지 않는다.

"한달에 열 벌 이상 만드는 건 무립니다. 미싱사가 세 명인데 지금 22년째 함께 일하는 분들이라 호흡이 척척이에요. 그런데도 그 이상은 자제합니다." 그의 디자인은 서양적이고 실험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미 80-90년대부터 파격적인 소재와 패턴을 과감히 사용해왔다. 그러면서도 무명옷을 만들 때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가벼움이 살아난다.

그는 서양화를 12년간 그렸고 비디오 작업도 10여년 했다. 판소리도 3년을 배웠고 내 고장 전통문화를 알기 위해 광주민학회도 20여년간 쫓아다녔다. 동서를 조화시키고 전통과 현대를 상생시키는 그의 옷들은 이런 폭넓고 속깊은 개인적 체험과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다.

◇잘 사는 비결은 `자연에 안겨가기' 동서의 조화도 좋고 전통과 현대의 충돌도 좋지만 그의 궁극적인 철학은 `자연에 안기기'로 요약된다. 무명에 대한 깊은 사랑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자연은 언제라도 안아주고 받아준다. 지식이나 철학 같은 것들은 모종의 규칙에 입각해야 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부드러운 법칙이어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밤 11-12시에 자고 아침 5시 전에 일어나는 습관을 지키고 있다. 그 나이라면 무슨 일로 밤을 샐까 궁리할 때였으련만 어찌 그런 모범적인 생활습관을? 하여튼 그 덕분인지 그는 훌륭한 체격에 건강이 넘친다.

한때는 수영도 열심히 했고, 지금은 등산에 푹 빠져 있다. 게다가 오랜 친구인 `지리산 도사'에게서 배운 `파워워킹' 덕분에 그의 신체는 파워 그 자체다. 파워워킹의 요체는 뒤꿈치를 들고 엄지발가락에 힘을 팍팍 주면서 걷는 순간마다 근육을 고무줄 당기듯 위로 당기는 것이다.

"거기다 한 가지 더요. 물푸레나무나 주목나무 막대기로 매일 복근을 때려보세요.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11년 전 시작할 때는 하루 50대씩 했지만 요즘은 한 번에 무려 1천 번을 때린다. 이렇게 매일같이 파워워킹 1시간, 복근타격 1천회, 그리고 이따금 탱자나무와 찔레꽃이 엉겨 핀 무등산 자락 산책하기, 가급적 차 타지 않기.

그의 웰빙은 단순한 건강증진 수준을 넘어 휴대폰과 이메일 안 쓰기, 심지어는 신용카드 갖지 않기로 비화된다. 요즘같은 세상에 어떻게 사나.

"걱정 마세요. 직접 한번 해보세요.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겁니다." 하긴 그러고 다녀도 그의 주변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으니 믿을 수밖에.

◇건축가 뺨치는 리모델러, 요리사보다 더한 미식가 대화를 패션으로 되돌리려는 나의 유도를 비켜가며 그는 또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연철학은 신체에 관한 관심뿐 아니라 주거공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점방이요? 이것도 다 제가 지었어요. 큰 공사는 사람을 시키지만 웬만한 건 아이디어나 디자인은 물론 공사까지 직접 합니다." 전남도청 뒤 남동에 자리잡은 그의 점방은 아담한 2층 건물인데, 입구와 벽면부터 공방으로 쓰는 뒤채에 이르기까지 어디 한 군데 눈길 지나칠 구석이 없다. 핸디코트로 바른 외벽부터 대리석 위에 어떻게 심었는지 모를 식물들, 곳곳을 가려주고 감싸주는 대나무들, 은은한 조명에 신비감을 발산하는 한옥의 격자문, 햇빛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는 2층의 천창(天窓), 돌과 벽돌과 목재의 조화, 온갖 책과 음반, 은장도와 매듭들, 도자 화로.

색깔과 자재, 배치와 처리방식 등 모든 것이 독특하고 아름답고 아늑하고 정성스럽다. 이곳에서 그는 틈만 나면 지인들을 불러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38채를 리모델링해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가장 최근작은 고향인 영광에 지은 형님의 별장이고, 경기도 퇴촌의 분위기있는 한식집 `담원'도 그의 손길을 거친 `작품'이다. 그에게는 목수, 도장공 등 늘 함께 일하는 팀이 있다.

"남의 집을 리모델링해 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주인의 인물을 아는 것입니다. 그의 성품에 맞춰, 가급적 자연에 가깝게. 그게 제 모토입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있는 것에다 덧대가면서 하는 게 좋습니다. 엉뚱하게 새로 짓는 것은 말리고 싶네요. 돈이요? 돈은 안 받아요. 그 일하면서 나도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데…." 미군부대나 공사장, 개인주택에서 나오는 폐자재, 특히 옛집에서 버려지는 문이나 창호 등은 밤을 새워서라도 기다렸다가 구해온다. 그의 점방 바로 앞길에서 공사가 있던 때에는 그의 창문 앞에 전신주가 아닌 나무가 서 있을 수 있도록 공사장 인부들에게 로비를 하기도 했다. 서울에 가면 논현동 건축자재점은 반드시 둘러본다.

지금은 없앴지만 점방 옆에 있던 화랑 겸 카페 탑전도 물론 그 스스로가 만든 건축물이었다. 한 10년간 이 공간을 운영하면서 그는 대부분 사비를 들여 화가들을 위해 60여회의 전시회를 마련해주었다.

"건축은 소우주입니다. 문 하나 내는 방식이나 위치에 따라 집 전체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우리가 몸담고 사는 곳을 소홀히하면 안돼요. 형편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유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 그는 전라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끝없는 예찬을 펼쳤다. "우선 자연보존이 상대적으로 잘 돼 있는 곳입니다. 개발시대의 소외지역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자연이 살아남은 거지요. 경계와 경계 사이에 여백이 많아서 좋고 음식이 풍부하고 맛있어요.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 전라돕니다." 이야기가 진도 쪽으로 흘러가자 거의 흥분상태가 됐다.

진도는 문화예술의 보고인데 정치인들이 진도를 도와준답시고 절경의 한가운데를 파서 성냥갑처럼 멋대가리없는 건물을 얹어놓질 않나, 최고 수준의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진도에 대해 아는 게 없질 않나, 게다가 최근엔 길을 쓸데없이 많이 내서 버려놨다는 것이다. 유홍준식 문화유산 해설도, 공도 컸지만 왜곡도 있어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은 별로 의식하지 않지만 그는 일찌감치 이 지역의 주요 문화운동가가 돼 있었다. 문화에 관련된 일이면 언제라도 나서고, 광주 비엔날레에서는 패션부문 행사의 조직과 운영을 맡기도 했다. 갤러리 탑전을 더 넓은 곳으로 옮겨 미술 관련 활동도 더 많이 하려 했다.

그러다 6년 전, 문득 모든 걸 접고 옷 만들는 일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그런 일들은 좋든 싫든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부담이었다.

"조직이란 걸 하면 결국 누군가를 눌러야 하고 누군가는 다치게 됩니다. 그래서 조직과 관련되는 일이나 직함은 모두 버렸어요. 이제는 옷에만 전념하고 있죠." 그렇다고 해서 그의 활동이 줄어든 건 아니다.

"물론이죠. 문화건 예술이건 나누지 않으면 무슨 재밉니까." 오랜 지인들인 김복희 이정희 제임스전 임동창 이동원 이영하 장사익 등 알려진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사람답게 사는 일에 조금만 관심있는 이라면 누구나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부침성도 좋으니 주변엔 언제나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 번은 광주ㆍ전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여사님들을 초대해 작은 파티를 열었다. 정갈하고 향기로운 음식이 즐비했으나 수저나 포크류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며 굳은 표정을 짓던 귀부인들께서는 그러나 이내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며 희희낙락했다. 그의 친화력의 승리였던 것이다.

그가 끌고간 진짜 맛있는 전라도 음식점 귀향정에서 쫄깃쫄깃한 고막무침을 먹으면서 동석했던 광주의 한 여성 예술가는 말했다. "김 선생님은요, 따라다니기만 해도 신이 나요." 이보다 더 즐거운 찬사가 있겠는가. 아마도 그를 만나보면 당신도 비슷한 헌사가 떠오를 것이다.

yesn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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